30초 요약: 옌창서우는 고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23세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우편실 막내로 시작해 28세에 대만 지역 총지배인이 됐다—그 자리에 앉은 최초의 대만인이었다. 32세에 아시나 그랜드 호텔(亞都麗緻) 총재가 되어 "손님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이름을 불러주는" 서비스 시스템을 만들었고, 재방문율 65%를 달성했다. 책은 60만 부가 팔렸다. 62세에 사직하고 타이둥에 오지 학교를 세우러 갔으며, 이듬해 신장암 진단을 받아 신장 하나를 절제했다. 2025년, 78세에 태평양 바닷가에 예술원을 완공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그저 대만이 좋아지길 바란다. 기초 공사는 누군가 해야 한다."
1980년대 중반 어느 저녁, 타이베이 敦化南路에 택시 한 대가 멈췄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도어맨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왕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차 안의 손님은 깜짝 놀랐다. 석 달째 이 호텔에 묵지 않았는데.
우연이 아니었다. 아시나 그랜드 호텔에는 당시 대만 어느 호텔도 하지 않던 시스템이 있었다. 공항 안내 직원이 손님을 확인하면 호텔로 차 번호와 도착 예정 시간을 전화로 알렸고, 교환원은 객실 번호를 조회했으며, 도어맨은 이름을 전달받았다. 손님이 택시에서 내려 방에 들어가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1. 객실에는 손님 이름이 인쇄된 편지지와 봉투가 놓였고, 명함에는 주소란에 "타이베이 자택: 아시나 그랜드 호텔"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방문 손님의 취향은 전부 컴퓨터에 저장됐다—어떤 디자이너는 밝은 조명과 경사진 제도대가 필요했고, 어떤 손님은 비단 옷걸이를 원하고 나무 옷걸이는 싫어했다—모두 체크인 전에 준비가 끝났다.
이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은 고등학교 졸업장만 가진 지룽 출신 청년이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우편실
1970년대 초, 23세의 지룽 출신 고졸 청년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대만 지점 문을 두드렸다. 지원한 자리는 사내 연락원—편지를 받고, 서류를 나르고,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다2.
그 시대 외국계 기업의 관리직은 전부 외국인 차지였다. 대만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은 행정과 후방 지원뿐이었다. 대학 학위 없는 현지 젊은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우편실 막내는 한 가지를 했다. 손에 닿는 편지를 전부 읽었다. 훔쳐보는 게 아니라—회사가 무슨 일을 하고, 고객이 무엇을 묻고, 어디서 흐름이 막히는지를 마음에 새겼다. 5년 후 그는 영업 기획서를 써서 적자 지점을 흑자로 돌려놓았다. 1975년, 28세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대만 지역 총지배인이 됐다—그 자리에 앉은 최초의 대만인이었다3.
"외국인을 위해 일할 때, 나는 회사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대만인을 대표했다." 그가 훗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4. 관용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23세에 남의 편지를 나르던 사람이라는 걸 알면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옌창서우. 훗날 사람들은 그를 대만의 "관광 대부"라고 불렀다.
아시나 그랜드 호텔: 프런트가 없는 호텔
1979년, 호텔업자 저우즈룽이 막 문을 연 아시나 그랜드 호텔(亞都麗緻大飯店) 총재로 옌창서우를 초청했다5. 그는 32세였다.
옌창서우가 내린 첫 번째 반직관적 결정: 프런트 카운터를 없앴다. 당시 대만의 모든 호텔에는 높은 접수 데스크가 있었다. 손님은 밖에 서고, 직원은 안에 서고, 사이에 물리적 장벽이 있었다. 옌창서우는 그것을 치웠다. 손님이 문을 들어서면 부지배인이 직접 다가가 소파로 안내하고, 커피가 나오고, 체크인은 대화 속에서 끝났다1.
두 번째 결정은 더 대담했다. 대만을 최고급 호텔 안에 들여놓은 것이다. 당시 대만 고급 호텔은 모두 유럽과 미국을 모방했다—유럽식 로비, 서양 요리 중심, 영어 서비스. 옌창서우는 항저우 요리 대가 한퉁좡을 초청해 톈샹러우(天香樓)를 열었다. 정통 항저우 요리를 내는 이 식당은 훗날 2018년과 2019년에 미슐랭 1스타를 받았다6. 로비에는 대만 예술가들의 그림이 걸렸고, 객실에는 중화 문화 디자인이 녹아들었다.
매주 월·수·금 저녁 6시부터 7시, 아시나에는 "아시나 타임(Ritzy Hour)"이라는 무료 칵테일 파티가 열렸다. 총지배인과 각 부서장이 직접 참석해 투숙객들을 서로 소개했다1. 목적은 사교가 아니라—"대만에 와서 외롭지 않도록, 아시나가 타이베이의 집이 되는 것"이었다.
결과: 재방문율 65% 이상, 광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1.
✦ "그는 방을 파는 게 아니었다. '대만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팔았다."
60만 부
1997년, 옌창서우는 《총재의 사자 심장(總裁獅子心)》을 출판했다7. 호텔 총재가 쓴 책이라니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60만 부 이상 팔렸다. 대만 출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경영서 중 하나다8.
왜였을까? 경영에 대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한 문장을 썼다. "나는 만사가 순탄하기를 빌지 않는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계속 맞서 나갈 용기와 의지를 달라고 빈다."9 서비스업을 "남의 시중"으로 여기던 1990년대 대만에서—우편실에서 총재까지 걸어온 사람의 이 말은 충격적이었다.
2008년 《내가 본 미래》는 공무원 필독서로 선정됐다10. 2011년 《교육은 달라야 한다》는 입시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입시 방식으로는 미래 인재를 키울 수 없다." 더 날카로운 말도 있었다. "학부모여, 정신 차려라. 아이의 재능을 죽이는 건 당신이다."11
호텔 이야기에서 국가 미래 이야기로. 돌아보면 이 책들은 옌창서우 인생 2막의 예고편이었다.
원산 대호텔: 체제에 막히다
1998년, 옌창서우는 원산 대호텔(圓山大飯店) 총지배인으로 영입됐다12. 원산은 대만에서 가장 강한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국영 호텔이다—장제스 부인 쑹메이링이 창립하고, 수많은 국제 원수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운영은 심각한 적자였다.
옌창서우는 아시나의 방식으로 원산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국영 체제의 저항은 혼자 밀어붙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999년 사직하고 나왔다. 채 1년도 안 됐다12.
이 경험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옌창서우가 이후 방향을 바꾼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다. 아시나에서는 프런트를 없애고, 메뉴를 바꾸고, 서비스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었다—자신의 무대였으니. 원산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체제가 개인의 의지보다 단단했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호텔을 바꾸는 것으로는 대만을 바꿀 수 없다고.
62세: 모라코트 태풍 이후
2009년 8월, 태풍 모라코트가 남부와 동부 대만을 강타했다. 옌창서우는 타이둥으로 내려가 재해 현장을 봤다13.
그가 본 것은 태풍 피해만이 아니었다. 오지 아이들의 처지였다—교사가 없고, 자원이 없고, 기회가 없었다. 도시 아이들은 영어 학원, 예체능 수업, 명문 학교로 가는데, 오지 아이들은 낡은 교실에서 오래된 교과서로,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을 마주했다.
2009년 12월 28일, 옌창서우는 공익플랫폼문화재단을 설립했다13. 30년을 일한 호텔 현장을 떠났다—사업 절정기에 서있던 사람이 모든 안락함을 내버렸다.
📝 편집자 주
옌창서우가 아시나를 완전히 끊은 건 아니었다—2016년 공식 이사장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이사장 직함을 유지했다14. 그러나 2009년부터 그의 시간은 거의 전부 화롄과 타이둥에 투자됐다. 그가 떠난 후 아시나 그랜드 호텔은 6년 연속 적자를 내며 8개 호텔에서 2개로 줄었다15. 이 사실은 날카로운 질문을 낳는다. 아시나의 영광은 시스템의 성공이었을까, 아니면 한 사람의 카리스마였을까? 옌창서우 없는 아시나는 여전히 아시나인가?
쥔이 학교: 교실 밖 장화
2008년, 불광산 성윈 스님이 타이둥에 쥔이 중·초등학교를 설립했다. 학교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2011년 성윈 스님이 옌창서우에게 전권을 맡겼다16.
옌창서우는 쥔이를 교육 실험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교정에 들어서면 교실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다—교실 앞에 나란히 놓인 장화들이다. 학생들은 쌀을 심고, 채소를 키우고, 닭과 오리를 기른다17. 나무 위 집을 짓는 학생도 있다. 어떤 학생은 세면대에 빗물 차단막이 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기획서를 쓰고 예산을 짜고 업체를 찾아 공사 감독까지 했다.
쥔이의 시험 방식도 다르다. 2시간 시험 중간에 선생님이 모르는 부분을 다시 가르쳐준다17. 18개 수업 중 12개만 교사가 가르치고, 나머지 6~8개는 학생 자율 탐구에 맡긴다. 학교 전체 뮤지컬—공연, 의상, 소품, 무대 장치, 연출, 조명—전부 학생이 직접 만든다.
2019년, 교육부는 쥔이를 "국제교육실험학교"로 공식 인가했다16. 재학생 중 3분의 1가량이 저소득 가정이나 조부모 손에 크는 아이들이고, 원주민 부족장이 특별히 추천한 아이들도 있다—선발 이유는 "부족으로 돌아갈 때 힘을 가져오길 바라서"다.
옌창서우의 교육 철학은 한 문장이다. 타이베이 기준으로 타이둥 아이들을 재지 말라.
⚠️ 논란
옌창서우의 대만 교육 비판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여러 공개 강연에서 "대학교 학과의 3분의 2는 다닐 가치가 없다", 젊은이들에게 "대만에 돌아오지 말라",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만 원한다"고 비판했다18. 이 말들은 그를 "꼰대 사장"으로 낙인찍었다—대학 학위도 없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젊은이들에게 훈수를 두느냐는 것이다. 지지자들은 듣기 싫지만 맞는 말이라고 했고, 비판자들은 성공한 자리에서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겪지 않은 구조적 압박을 감수하라고 요구한다고 했다.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 논쟁 자체가 대만 사회의 교육·세대·계층 문제의 깊은 균열을 드러냈다.덜 알려진 또 다른 논란: 그의 컨팅 유훠 리조트(悠活麗緻渡假村)는 14년간 환경영향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채 운영됐다. 반면 그는 공개적으로 쑤화(蘇花) 고속도로 건설을 환경 보호를 이유로 반대했다19. 환경 입장과 사업 행동 사이의 모순은 그의 공익 이미지에서 가장 취약한 틈이다.
2010년: 신장 하나를 잃다
2010년, 옌창서우는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종양이 신장 중심에 있어 부분 절제가 불가능했다. 신장 전체를 들어냈다20.
2011년 《교육은 달라야 한다》 후기에서 이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신장 하나를 잃고 난 뒤 매일 식단은 이렇게 됐다—아침에 두유, 계란, 파파야, 점심에 채소, 저녁에 생선21. 그리고 계속 화롄과 타이둥의 학교와 재단을 누볐다.
2011년 10월 25일, 총통부에서 3등 경성훈장을 받았다22. 우편실 막내에서 총통부까지 온 것이다.
진쭌의 27미터
2025년 3월 15일, 타이둥 진쭌(金樽). 장시엔얼(江賢二) 예술원이 개관했다23.
옌창서우가 12년을 밀어붙인 프로젝트였다. 장시엔얼은 대만에서 가장 중요한 추상화가 중 한 명으로, 만년에 타이둥에 정착했다. 옌창서우는 그를 설득해 진쭌 바닷가에 예술원을 세웠다—타이베이도 아니고, 어떤 상업 지구도 아니고, 대만에서 가장 외진 동해안에.
건축가 린유한(林友寒)이 다섯 동의 건물을 해안 산맥 경사면을 따라 설계했다. 가장 높은 "청한관(承翰館)"은 27미터로, 장시엔얼의 철 조각품을 20배 확대한 형태다24. 외벽은 노출 콘크리트, 지붕은 내후성 강철로 덮었다—시간이 지나면 산화되어 붉은 갈색으로 변하는, 건물이 타이둥의 땅과 함께 나이 드는 소재다. 원내에는 선인장 정원, 실버레이크 복도, 드뷔시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옌창서우는 원장을 맡았다. 그의 비전은 츠상(池上), 진쭌, 동해안의 다른 거점들을 하나의 예술 군락으로 연결하는 것이다—일본의 세토내해 예술제에 필적하는24.
78세. 신장 하나 없이. 그는 여전히 타이둥을 위해 기초 공사를 하고 있다.
"나는 그저 대만이 좋아지길 바란다. 기초 공사는 누군가 해야 한다."4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듣는다. 편한 자리에서 훈수만 둔다는 말도 듣는다. 두 가지 모두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든, 한 가지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 사람은 후반생의 매일매일을 대만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구석에서, 가장 멋없는 기초 작업을 하며 보냈다.
그 교실 밖 장화는 아직 거기 있다. 논에는 쌀이 자라고 있다. 나무 위 집은 아직 짓는 중이다.
참고 자료
- 풍전미디어: 아시나 그랜드 호텔에 한 번 묵으면 왜 반드시 다시 오게 되는가 — 아시나 서비스 시스템 전체 설명: 프런트 제거, 공항-호텔 이름 릴레이, 맞춤형 객실, Ritzy Hour, 재방문율 65%↩
- 대만 광화 잡지: 막내에서 총재까지 —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연락원 시절 초기 이력↩
- 옌창서우 — 위키피디아 — 1975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대만 지역 총지배인 취임, 최초의 대만인 주관급↩
- 500집/연합보: 옌창서우 — 인생의 두 번째 산 — "외국인을 위해 일할 때 나는 회사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대만인을 대표했다" "나는 기초 공사는 누군가 해야 한다"↩
- 옌창서우 — 위키피디아 — 1979년 아시나 그랜드 호텔 총재 취임↩
- Vocus: 대만 관광 대부 옌창서우 — 톈샹러우 항저우 요리, 한퉁좡 대가, 2018/2019 미슐랭 1스타↩
- 보커라이: 총재의 사자 심장(20주년 개정판) — 1997년 초판, 대만 출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경영서 중 하나↩
- 《총재의 사자 심장》 누적 판매량 약 60만 부↩
- 옌창서우 《총재의 사자 심장》 인용문↩
- 보커라이: 내가 본 미래 — 2008년 출판, 공무원 필독서 선정↩
- 연합보: 옌창서우 교육 인터뷰 — "체제 내 교육은 완전히 틀렸다" "학부모여, 아이의 재능을 죽이는 건 당신이다"↩
- 옌창서우 — 위키피디아 — 1998년 원산 대호텔 총지배인 취임, 1999년 사직↩
- 공익플랫폼문화재단: 창립 경위 — 2009년 모라코트 태풍 후 타이둥 방문, 2009년 12월 28일 재단 설립↩
- 옌창서우 — 위키피디아 — 2016년 아시나 그랜드 이사장 공식 퇴임↩
- CTWANT: 아시나 8개에서 2개로 — 옌창서우 퇴임 후 아시나 연속 적자, 2023년 주주 내분↩
- 쥔이 국제교육실험학교: 학교 소개 — 2008년 성윈 스님 창립, 2011년 옌창서우 인수, 2019년 교육부 국제교육실험학교 인가↩
- 연합보: 쥔이 학교 교육 현장 — 나무 위 집, 빗물 차단막 기획서, 시험 중 재교육, 전교생 뮤지컬 제작↩
- 옌창서우 — 위키피디아 §논란 — 2012~2015년 청년 비판 발언과 "꼰대 사장" 논란↩
- 대기원: 화롄 주민 아시나 항의 시위(2007) — 컨팅 유훠 리조트 14년 미환평, 옌창서우의 쑤화 고속도로 반대 입장↩
- 공공TV: 수술 후 첫 등장, 옌창서우 삶과 죽음을 말하다 — 2010년 신장암 확진, 신장 전체 절제↩
- 야후 뉴스: 화롄·타이둥 16년, 옌창서우의 황금기 — 수술 후 식단 조정과 화롄·타이둥 활동 지속↩
- 옌창서우 — 위키피디아 — 2011년 10월 25일 3등 경성훈장 수훈↩
- 천하잡지: 장시엔얼+옌창서우, 12년의 예술원 — 2025년 3월 15일 개관, 옌창서우 원장 취임↩
- MOT TIMES: 장시엔얼 예술원 건축 설계 — 건축가 린유한, 청한관 27미터(철 조각품 20배 확대), 노출 콘크리트+내후성 강철, 5동 경사면 배치. VERSE 보도 선인장 정원, 드뷔시 카페, 세토내해 예술제 벤치마크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