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월 21일, 후커우(湖口) 기갑병 제1사단 부사령관 자오즈화(趙志華)가 연병장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북상하여 왕실을 구하라(北上勤王)"라고 외쳤을 때, 그 뒤편의 승리로는 여전히 고요한 시골길이었다. 단 두 시간 동안 지속된 이 미수 정변으로 인해 후커우는 타이베이 고위층의 눈에 '반란'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담장 너머 후커우 사람들의 눈에 이 거대한 존재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그 시절, 후커우 병영은 단순한 금지 구역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복지 센터'였다.
당시 병영 내부에는 영화관과 수영장이 있었으며, 심지어 주민들이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는 복지사(福利社)까지 있었다. 그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에게 여름의 기억은 수영장의 물기 어린 공기와, 외부보다 저렴했던 복지사의 군용품들이다. 당시 군과 민의 경계는 철저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생하는 이웃 관계였다.
📝 큐레이터 노트: 군사 병영이 일상적 소비 공간으로 기능할 때, 담장은 정치적 경계에서 이웃의 생활 기능이 확장된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이 '이웃'은 또한 격렬한 충격을 가져오기도 했다.
승리로 한쪽을 따라 병영 담장과 민가가 인접해 있다. 주차 공간이 부족했기에 지역 주민들은 담장 옆을 '승리로 대형 주천장'이라 농담조로 부르곤 했다. 이곳의 풍경은 2007년 5월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맞이했다. 싱가포르(대만 공군) 소속 '성광부대(星光部隊)'의 F-5F 전투기가 임무 수행 중 후커우 병영에 추락한 것이다. 거대한 폭발음과 치솟는 검은 연기는 지금까지도 승리로 주민들에게 경악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후커우 병영이 타이완 사회에 던진 파동은 2013년에 정점에 달했다.
후커우 기갑 제542여단 소속 하사 홍중추(洪仲丘)가 전역을 앞두고 부당한 체벌로 사망하였다. 이 비극은 25만 명의 '백의군(白衫軍)'이 카이다그란 대로(凱達格蘭大道)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 《군사재판법》의 중대한 개정으로 이어졌다. 후커우 사람들에게 그것은 담장 안의 가장 무거운 그림자였으며, 승리로라는 이름이 전국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유독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 큐레이터 노트: 역사는 후커우에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하나는 1964년 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다른 하나는 2013년 인권에 대한 각성이다.
오늘날 승리로를 걷다 보면 영화관과 수영장은 이미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2000년대 초반, 천수이<0xEB><0xB3><0x9C>(陳水扁) 총통이 후커우를 직접 방문하여 국방 시연을 주재했을 때, 줄지어 지나가던 전차들과 선회하던 헬리콥터는 참관하던 고등학생들에게 무한한 경이로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여전히 타이완 기갑병의 심장부이지만, 승리로의 민가와 나란히 자리 잡은 조용한 거수(巨獸)와도 같다. '반란의 발원지'에서 '지역 주차장'에 이르기까지, 후커우 병영의 담장은 타이완이 계엄 시대를 지나 발전하고 민주화로 전환되는 과정에서의 모든 모순과 온기를 기록하고 있다.